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빅토리아 멜리타 (문단 편집) === 러시아 혁명 === 1917년에 [[러시아 혁명]]이 일어나면서 러시아의 황족이었던 빅토리아와 키릴도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.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[[핀란드]]로 망명했고, 그곳에서 빅토리아는 외아들 [[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로마노프]][* 1917.8.30.~1992.4.21. 생몰년을 보면 알겠지만 '''소련과 인생을 함께했다.''' [[소비에트 러시아]]가 세상에 등장하기 두 달 전에 태어나 [[소련]]이 붕괴한 지 네 달 뒤에 사망했다. 러시아 ~~소련~~ 땅을 밟은 건 1991년 11월이 처음이자 마지막. [[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로마노바|마리야]]의 아버지.]를 낳았다. 하지만 러시아의 혼란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, 빅토리아와 키릴 부부는 물자 부족으로 고통받았다. 빅토리아가 자신의 사촌인 [[스웨덴]]의 [[코넛의 마거릿 공녀|마거릿 왕세자비]]에게 아기가 먹을 이유식을 보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. 한편으로는 또 다른 사촌인 [[조지 5세]]에게 러시아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. 2년 간의 힘겨운 망명 끝에 부부는 빅토리아의 친가인 코부르크로 향했다. 코부르크에서 빅토리아는 반공 성향인 [[나치당]]에 관심을 가지고 돈을 기부했다. 당시 나치당은 창당 초기로 그때까지만 해도 큰 세력은 아니었다. 이윽고 [[니콜라이 2세]]와 [[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|알렉세이 황태자]], 니콜라이 2세의 동생인 미하일 대공이 모두 볼셰비키에게 살해당한 상황에서 로마노프의 수장은 키릴이 되었다. 키릴은 자신이 러시아의 새로운 황제라고 선포했으나, 이에 대한 로마노프 일족의 반응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. 그 이유는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된 후 가장 먼저 [[러시아 공화국|러시아 임시 정부]]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 키릴이었으며[* 다른 로마노프 황족들은 이를 두고 황제를 배신했다고 비난했다.], 니콜라이 2세의 모후인 [[덴마크의 다우마]]도 멀쩡히 살아있어서 현실적으로 제위를 주장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. 로마노프 일족에게 있어 키릴의 황제 선포는 니콜라이 2세가 죽기만을 기다렸다가 황제를 참칭한 것과 진배없었다. 그러나 빅토리아는 병이 난 키릴을 간호해가며 남편의 뜻을 지지했다. 한편 [[소비에트 러시아]]와 손을 잡은 [[독일]] 입장에서 키릴은 황당하면서도 거슬리는 존재였다. 결국 독일 정부의 압박으로 빅토리아와 키릴은 [[프랑스]]의 생 브리악으로 이사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